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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기록

여행, 그리고 2017년 마지막 날

AQUIALICE 2017. 12. 31. 10:48

여행 다니는걸 좋아하다보니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려움 없이 자라
해외 많은 곳을 다녔나보다
오해하시는 분들이 참 많다.
아무래도 그분들에겐 지금의 내모습만 보이니까.

사실 내 첫 해외경험은
24살때 첫 직장에서
미국 사업에 경험차 따라갔던 것이었다.

대학생이라면 필수로
해외여행,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때였는데
사실 나는 대학생때 오히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소위 운동권 학생이었고
해외여행은 우리집 가난해서 안 된다
생각했었다.

처음 해외에 가는건데 미국이라니
또 게다가 출장이라니
며칠전부터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는 영어도 못하는데'부터 시작해서
'남들 다 어학연수갈 때 난 뭘했나'까지
그러다보니 그 좋다는 뉴욕에 가서도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고
그저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출장 아닌 첫 여행은
3년간 모든걸 걸다시피 했던 업에 지쳐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을 때 떠났던 삿포로였다.

직업상 해외여행을 가기 어려웠던 아빠는
어리게만 생각되는 딸이
연락한번 안 하다가 "내일 여행가"라고 하니
온갖 육두문자을 날리셨다.

그렇게 도망친 여행.

때마침 받은 퇴직금으로
비싸게 끊은 항공권,
그렇게 급하게 도망쳤다.

게다가 첫 여행인데다 혼자다보니
숙소도 엉뚱한 곳으로 잡아
숙소 오가는데만 해도 엄청난
돈과 시간을 낭비했다.




하지만 모든게 너무 좋았고 또 좋았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
김남희가 아니라 그냥 한국인 여행자가 되는건
놀라울 만큼 나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별걸 하지도 않았는데
여행초보자라 여기저기 구경은 커녕
그냥 카페에 앉아 일기를 쓰고
걷고 또 걸었다.

카페에 앉아
일기를 쓰던게
아직도 생생해서 그 때의 공기
그때의 커피 냄새가 지금도 나는듯하다.






삿포로 텔레비 타워에선 멍하게
멍- 하니 계속 그 세계를 내려다 보았다.

이렇게나 다른 세상들이 있고
나는 저기 보이지도 않을 작은 존재일뿐인데
나는 뭐가 그렇게 날마다 힘들었을까.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삶이 있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세계들이 이렇게 많은데
나는 고작 왜 그 작은 내 삶에서
날마다 허우적 댔을까.

마음이 후련했다.
나를 둘둘 감싸고 있던 고통스럽던 밧줄이
툭- 하고 끊어진 것 같았다.






세상은 넓고 아름다운데
나는 내 세계에서
뭘 그렇게 어떻게든 해보려 애를 쓰고
점점 나를 더 작은 세계에 가두려 할까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세계가 많고
아직 내가 도전하지 못한
많은 삶들이 있는데 말이다.






근데 자꾸 잊는다.
내가 보내야 하는 일상은
그 며칠간의 여행이 아니고
화가 나고 좌절 하게 되고
또 그 안에서 웃고 지지고볶아야 하는 삶이니까.

그래도 그 작은 세계에
잠식되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고작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구름 위에서,
높은 텔레비타워에서,
도쿄타워에서 느꼈던
마음들이 언제나 날 잘 붙들어줬으면 좋겠다.

늘 터닝포인트라고 말한
동남아 여행의 기억이
나를 다독여주고 나를 다잡을 수 있는
좋은 기억이 되기를.





그러면서도 여행을 가기 위해
힘든 삶을 버텨내지 않기를.
여행만이 행복이 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힘을 갖기를 -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 없고
누구는 안 힘들겠냐만은
내가, 또 우리가
그 힘든 삶들을 잘 해내고 있다고
잘 하고 있고 잘 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이 작은 세계에서 그렇게
아둥바둥 날 망가뜨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충분히 잘 해내고 있고
꼭 애써 잘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넓은 세상에
내 아름다운 삶에
이게 전부가 아니니까.







내년엔 좀 더 많이
내려놓고 싶다.
더 넓게 넓게
넓은 시야를 갖고 싶다.

또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도
꼭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까지 화내지 않아도 된다고.






근데 새삼 다음 여행은 혼자 떠나고 싶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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